“배워서 다져지고, 자기 마음을 꺼내고, 독자성·창의성 유지하는 것이 필요”
<컬처제주> 명예발행인 강요배 화백. 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며 겸손을 표했다. ‘그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고 강 화백은 말한다. 또한 모든 이들에게 공감되는 작품을 그만의 화법으로 그려낸다. 많은 이들이 현재를 살아가며 겪는 것들, 느끼는 것들을 작품 속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녹여내기에 강요배라는 이름이 대중들의 마음에 거대한 모습으로 성큼 다가오는 게 아닐까. 강요배 화백을 만났다.[편집자 주] |
Q. 먼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습작들도 많이 보관하고 계시다던데요. 그 사연부터 말씀해주시죠.
A. 아, 어릴 때 그린 그림들 많이 남은 거, 그건 순전히 제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작품 중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쓴 '혁명정신'이라는 붓글씨도 있으니까요. 혁명정신이라는 거 혹시 알고 계세요? 그건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 5.16 혁명정신을 말합니다. 당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혁명을 강조하며 쓰게 했던 환경이었으니 군사정권의 폐해가 오죽했겠는지 짐작되십니까?
중학교 다닐 즈음이었는데 제 어머니가 유년시절부터 제가 그린 작품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궤짝에 보관해 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뒤부터는 저 역시 작품을 소중히 여겨 보관하기 시작했고요.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50, 60년 전의 작품들이 남아 있는 연유입니다.
Q. 그러면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리셨겠네요. 그 소질을 살려서 서울대 미대까지 진학하게 되신 겁니까?
A. 저는 꽤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어릴 적부터 꼭 화가가 되어야지, 하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림은 특별활동처럼 그냥 즐겨했을 뿐이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에는 자연계열이었는데 건축공학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집안에서는 막내인지라 가정사나 식구들에 대한 부담은 없었으나 학비 문제로, 오로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국립대학을 가야한다는 마음에 서울대 미대를 택한 겁니다.
물론 당시만 하더라도 예술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삶의 방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시절이었기에 그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고향 집에서는 네가 알아서 살아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부모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자립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않습니까?
요즘 세상은 시스템이 너무 틀에 꽉 잡혀 있어서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진로를 택해 가능성을 찾기가 오히려 힘든 상황이라 여겨지지만 그 당시에는 빈틈도 많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내가 하려고만 한다면 가능성과 희망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미대를 택했다고나 할까요?(웃음)
Q. 귀향하셔서 고향인 삼양을 택하지 않고 그 반대쪽인 귀덕에 정착하신 이유가 어떤 건가요?
A. 도시를 벗어나고자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경계라고나 할까요? 주변에 바다도 가깝고 농촌풍경도 있고, 멀리 산도 잘 보이고 해서 택한 곳이 여기 귀덕이라 할 수 있어요. 간혹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이들도 있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사람들과의 교류는 중요하거든요.
Q. 이제 선생님의 작품세계에 대해 듣고자 합니다. 시대별로 굴곡이 있으시죠? 어떤 변화를 겪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게 됐는지 듣고 싶습니다.
A. 글쎄요. 시대별이라. 10대 시절에는 말을 배우며 현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모방하던 학습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20대는 부분이 전체적인 개념으로 확장하던 시기로 큰 상징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청춘의 시기였죠. 이를테면 삶과 죽음, 신비, 신(神), 선과 악 같은 주제들이지요. 30대 초반에는 구체적인 삶과 사람에 대해 꼼꼼히 들여다보며 작업을 했는데 화폭에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한 시기고요. 후반이 되면서는 삶을, 이 세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게 됐는데 그 결과물이 <동백꽃 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해, 40세 되던 해에 제주로 귀향했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고향 제주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사실 <동백꽃 지다>에서 사람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자연이거든요. 50대가 되면서 제주의 자연을 외부적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했죠. 50대 후반부터 60대까지는 외부의 사물보다 자신의 내면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요. 자연, 사물에 투영된 내 마음의 격동적인 리듬이 표출되었다고나 할까요?
최근의 제 작품을 보면, 말은 다 어디로 가고 사람들과 사연은 또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라는 얘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작품속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리듬입니다. 제 그림의 방점은 곧 마음이거든요.
저는 운전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걷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제가 아마 올레길을 걸은 1호가 아닐까 합니다. 40세에 제주로 이주하고 나서 자연 속에서 더없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당시 보고 느꼈던 것들, 그리고 지금 보고 느끼는 것들, 이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Q. 선생님에게 있어서 4·3이란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시겠습니까?
A. 30대 후반에서 40세까지, 그림으로 치면, <제주민중항쟁사>까지 제주 역사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역사를, 제주의 수난사를 공부한 시기이기도 하고요. 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시대별 그림 작업을 하게 된 것인데, 이 역시 끊임없이 공부를 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나온 게 <동백꽃 지다>였다고 할 수 있죠.
저는 문학이든 미술이든 제주의 예술가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4·3을 공부하고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주 예술에 있어서 4·3은 기본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역사적 인식, 기본이 갖춰질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바의 다른 작업들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나의 역사를 알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것은 누구든, 제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제주4·3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Q. 바람의 흔적을 보여주는 팽나무 그림이 무척 인상적인데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나요?
A. 팽나무. 그것은 단순한 나무가 아닌, 역사의 숨결이 밴 나무입니다. 나무는 몸통 속에 나이테가 있기 마련인데, 시간이 공간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죠. 시·공간을 이동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바람결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요. 수백년을 부는 바람, 시간은 바람이 부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예전 4·3때 바람과 지금의 바람이 크게 다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시원始原>이라는 작품은 폭낭 아래 할머니와 아이가 있는 그림인데, 할머니의 시선이 아득한 옛날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그 시선이 머무는 곳은 단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바람 또한 예전에도 불던 그리고 수만년 지난 지금도 부는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Q.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일테지만, 혹시 첫 전시를 열었던 추억이 기억나십니까?
A. 엄밀하게 말한다면 제주에서 첫 전시회는 1976년에 열렸어요. 20대 시절 군 복무 중에 휴가차 한 달 가량 고향 제주에 내려와 있으면서 관덕정 부근에 있었던 대호다방에서 연 전시회였죠. 당시에 전시공간이라고 해봐야 다방 정도였으니까요. 다방 벽면을 활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선생님을 롤모델로 삼아서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A.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꼭 파리나 뉴욕을 선망하며 그곳으로 가야하는가, 라고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탐구하고 공부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까닭에 제가 제주로 돌아오기도 했고요.(웃음) 제주를 나의 학교로 삼아 그림을 그려보자라는 마음이었지요. 내가 본 것, 나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 인정을 받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면 그 속에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밝혀주신다면?
A. 스스로 배워서 다져지고 그 안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고 자기의 독자성, 창의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이 앞서는 주제나 소재들이 형태는 사라지고 향기와 맛깔만 남아있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다른 변화를 통해 그것을 더 단순화하고 압축해 앙금을 만들고, 더욱 강렬한 것을 만들어가려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나의 인생의 과제이고, 나아갈 방향으로 여기고 있어요.
- 오랜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